주체108(2019)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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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8(2019)년 8월 30일 《통일의 메아리》
민족의 얼 (27)

장편실화소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리원주, 리원갑 작 《민족의 얼》, 오늘은 스물일곱번째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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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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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윤재는 새해부터는 연희전문학교에서 조선어강의까지 맡게 되였다. 팔판동의 집을 나서서 서대문을 지나 아현동고개를 넘어 신촌동에 있는 연희전문학교에서 오전에 강의를 하고 그길로 오후강의가 있는 동대문밖 관훈동의 동덕녀자고등보통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자면 50리길은 잘된다. 그러나 그는 이 먼길을 전차를 타고 다니는 일은 전혀 없다. 아무리 추운 날도, 무더운 날도 그저 걷는다. 어지간해서는 왜놈의 운수수단을 쓰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호주머니에 백통전이라도 몇잎 있는 날이면 도중에 설렁탕집에 들려 한그릇 하거나 오전짜리 호떡 한개로 점심을 에울수도 있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점심을 건느는 일이 많았다. 이런 일이 루적되여 그의 위에 무리가 가더니 어느날 끝내 심한 토혈을 하고 드러눕게 되였다. 집에서는 먹을 갈아 먹인다, 단골의원인 손진사를 데려온다 하며 법석이 벌어졌지만 리윤재는 아는 병이라 태연자약하게 누워있을뿐이였다.

앓아누운지 이틀만에 리극로가 문병을 왔다.

리윤재는 리극로와 오랜 지기일뿐아니라 둘 다 신통히도 같이 오래고 복잡한 길을 우회하다가 조선어연구의 길에서 다시 만났던것이다.

리극로는 그해 즉 1929년 정월에 도이췰란드 베를린에서 귀국했다. 그는 자기가 연구했던 전공과 관련된 분야에 관계하지 않고 벌어먹고 살길도 없는 조선어연구회에 발을 들여놓았던것이다.

그의 관심을 끈것은 우리 말의 음운의 리치였으며 이미 도이췰란드에서 발전된 기구를 리용하여 실험한 자료를 가지고 왔던것이다.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 민족정신을 고수하겠다는 맺힌 마음에서 그는 철학자로부터 조선어학자로 방향을 바꾸어앉은것이다.

그는 서울에서 아직 집을 마련하지 못하여 시골에서 소학교훈도를 하는 안해와 자식들을 서울에 데려오지 못하고 독신생활을 하다나니 리윤재의 집에서 한동안 숙식한 일도 있어 이 집 가족들과는 이미 친숙했다. 그는 붙임성이 좋고 구변이 좋아 김해댁은 그를 곧 좋아하게 되였다. 키가 크고 몸집이 좋아 풍채가 름름한데다가 관골이 류달리 솟은것은 그의 의지적인 성격을 보여주는데 그와는 반대로 겁이 많을듯 커다란 눈은 양같이 순해보여 사람에게 호인상을 준다. 큰 몸집에 어울리게 목소리가 굵고 우렁우렁하여 대장부다운 기상도 엿보인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김해댁이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밥상이야 며느리도 나를수 있는것이지만 김해댁은 리극로를 특별히 대접하여 손수 들고 들어온것이다. 자개상에는 곡상으로 담은 밥이 놓여있다. 반찬은 열무김치에 콩나물국과 구수한 두부찌개와 간장 한종지가 다였다.

《이거 찬이 없어 어쩌나.》하고 김해댁이 혀를 끌끌 찼다.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게 다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몸이 불편할 때 고향의 구수한 토장찌개생각이 어찌도 나던지. 어머니도 함께 자십시다.》하고 리극로가 말을 받았다.

《아니, 난 이따가 애들하고 같이 먹겠어. 찬이 없어도 많이 자셔.》

《예, 저는 먹는데 사양치 않습니다.》

정말 그는 탐스럽게 밥을 먹는다. 숟갈로 큼직큼직하게 밥을 몇술 뜨니 밥그릇이 푹푹 자리가 났고 반찬도 남김없이 그릇을 가시듯 깨끗이 먹는다.

그는 숭늉을 마시고 그릇을 상에 놓으며 말했다.

《조선사람에게 못된 버릇이 하나 있어요. 남의 집의 음식을 대접받을 때 음식을 적당히 먹고 남겨야 인사가 되는것으로 여기는 그 체면말이예요. 저는 그런 체면은 딱 질색이예요. 주는건 다 먹어야 주인에 대한 인사가 되지요. 안 그래요, 어머니?》

《그렇지 않구.》

김해댁은 리극로의 이야기에 끌려 밥상을 문앞에 밀어만 놓고 그냥 앉아있었다.

리극로는 담배를 안 피우는 대신 식후의 한담을 좋아했다. 그 한담이 시작된것이다.

《허식이란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것이니 백해무익한것이지요. 왜놈들처럼 허례허식이 많은 놈들도 없는데 아마 그걸 미워하는데서는 환산선생이 저의 열갑절은 될거예요.》하고 그가 묵묵히 벽에 기대여앉아있는 리윤재를 돌아보았다.

리극로가 다시 김해댁을 돌아보고 말을 이었다.

《어머니, 제가 이야기를 하나 하랍니까?》

《그리여.》하고 김해댁의 얼굴에는 미리부터 웃음이 어리였다.

《제가 환산선생을 알게 된게 열여덟살때였으니 벌써 열여덟해전이군요. 그때까지 저는 의령에서 농사군의 자식으로 땅이나 뚜지고 살았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했지요. 그런데 하루는 우리 고장에서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락동강으로 큰 바위만 한게 연기를 뿜으며 기여올라왔지요. 마을사람들이 기겁을 했어요. 괴물이라고 여겼거던요. 그런데 그때 남보다 좀 깬 사람이 하나 있어서 저건 괴물이 아니라 왜놈의 기선이라는 배라고 말했지요. 처음에 마을사람들은 믿지 않았지만 저는 그때 통탄하기를 (이런 절통할데라고있나. 왜놈들은 저런 큰 바위만 한 배를 끌고 남의 나라에 기여드는데 우리는 그걸 배라는것도 모르고있으니. 배우지 못하고 깨지 못해 그렇다. 새 학문을 배워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들고있던 호미를 밭에 팽개치고 달아났지요. 그길로 마산에 가서 기다란 머리태를 자르고 창신학교에 들어가니 그때 환산선생이 거기서 선생을 하고계셨습니다.》

리극로는 여기서 이야기를 잠시 끊었고 김해댁은 그 다음이 궁금하여 군침을 삼켰다.

《다 자란 총각이 조무래기아이들속에 끼여 공부하자니 참 가관이였지요. 꼭 병아리를 몰고 다니는 암닭같았어요. 그런데 어느날 그만 감기에 걸렸지요. 우들우들 떨리는데 옷이란 입고 온 베잠뱅이뿐이라 학교에 가자니 늦가을추위에 떨려 안되겠고 결석을 하자니 답답해 견딜수 없어 (에라, 모르겠다. 체면이 다 뭐냐. 배우는게 장땅이지.)하는 생각에 이불을 쓰고 학교에 갔지요. 그 꼴을 하고 교실에 떡 들어서니 환산선생이 수업을 하고있더군요. 선생은 괴상망측한 제 꼴을 보고 어디가 아프냐고 한마디 묻고는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교실에서 이불을 쓰고 공부를 했는데 아마 이런건 고금동서에 저 하나밖엔 없었을거예요. 환산선생, 기억이 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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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장편실화소설 《민족의 얼》을 보내드렸습니다.

오늘은 스물일곱번째시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