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8(2019)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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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8(2019)년 8월 26일 《통일의 메아리》
민족의 얼(25)

장편실화소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리원주, 리원갑 작 《민족의 얼》, 오늘은 스물다섯번째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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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찾아간 동포는 장사를 잘하여 끼니걱정을 모르고 살며 림정사람들과 독립운동자들에게 큰 도움은 못 주어도 푸짐한 식사를 대접하는데는 린색하지 않은 사람이였다.

셋이 자리를 잡고 앉자 상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야기도 활기를 띠였다.

김구는 젊은 나이에 온갖 고초를 다 겪고 벌써 로련한 티가 나는 최기봉의 얼굴을 애무하듯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최군, 자네가 독립군을 한이래 거의 10년동안 왜놈을 몇두름이나 잡아치웠는가?》

《저의 중대가 북만, 남만, 국경연선에서 잡아죽인 왜적을 두름으로 엮어놓으면 몇두름 잘됩니다.》

김구는 호탕하게 웃다가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장래없는 독립군의 조락이란 말이지. 그게 다 우리의 잘못이야.》

그리고 시름겹게 술잔을 들었다. 리윤재는 원래 술을 안하고 최기봉은 례절상 들지 않으니 김구가 혼자서 잔을 들수밖에 없었다. 독한 술을 두어잔 들더니 그는 얼마간 흥분했다.

《환산은 왜놈이 칼을 벼리고있는 고국으로 떠나야 하지, 최군은 똑똑한 지도자가 없는 독립군에서 향방없는 방황을 해야 하지, 나는 이미 찌그러진 림정의 대들보나 떠받들고있어야 하지, 마치 다리부러진 노루가 한곬에 모인 꼴이군.》

김구의 얼굴에 한순간 떠올랐던 호탕한 웃음은 이미 사라지고 고랑같은 주름살이 가득히 패이였다.

그가 시름겹게 말했다.

《허지만 내가 대들보를 떠받들고있는지, 서까래를 붙들고 매달려있는지 모르지. 지금 림정은 재정난으로 이름을 유지하기도 막연한 형편이요. 정청(림정청사)의 집세가 30원, 심부름군의 월급이 20원미만인데 이것도 댈 힘이 없어서 집주인에게서 여러번 송사를 겪었소. 나는 잠은 정청에서 자고 밥은 돈벌이를 하는 동포의 집을 이집저집 돌아다니면서 얻어먹고있소. 이거야말로 거지중에서도 상거지신세지. 림정은 비기건대 이름났던 대가가 몰락하여 거지의 소굴로 된것과 한가지요. 이러다간 강냉이가루빵 한개로 끼니를 에울 날도 멀지 않을것 같소.》

《망국민인 조선사람이 어디 있은들 편안할수가 있습니까. 국내에 있는 우리도 사정은 한가지입니다. 조선어연구회라는 학술단체를 뭇고 <한글>이라는 잡지를 냈지만 돈이 없어 아홉달만에 정간했고 왜적의 민족말살정책이 날로 우심해가는 조건에서 조선어사전이라도 엮어놓자고 시도했지만 역시 돈사정으로 중단되고말았습니다. 이번 저의 상해걸음은 어떻게 하든 사전편찬을 재개해보자는 모대김에 불과합니다.》

《안됐소. 우리 림정의 형편이 이 꼴이니 국내에서 왜적의 탄압을 받으며 조선어를 지키겠다고 안깐힘을 쓰는 학자들의 노력에 다소의 후원도 못해주었구려.》

김구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그 솥뚜껑만 한 손을 꽉 쥐여 상우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허나 김구가 쓰러지지 않는 한 림정은 꺼꾸러지지 않소. 내가 죽어도 림정의 간판만은 베고 죽겠소. 왜놈의 침략으로 대륙의 정세가 날로 험악해지는데 이건 우리에게 유리하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도 대일전에 참가하겠소. 여보게 최군, 현황에 너무 실망하지 말게. 우리의 지상목표는 조선독립이야. 물고뜯어서라도 이건 성취해야지.》

그리고 그는 주인한테 말해놓았으니 둘이서 오늘 밤 이 집에서 묵으며 회포를 나누라고 이르고 자리를 떴다.

김구가 마지막으로 한 말의 여운이 한동안 방안에 감도는듯 둘은 한참동안 묵묵히 앉아있었다. 조락해가는 독립군과 운명을 같이해가는 최기봉의 처지를 생각하는 리윤재의 마음은 저물어가는 저녁하늘처럼 무겁기만 했다.

최기봉이 입을 꾹 다물고있다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올해 서른살입니다. 옛말에 서른살이면 제발로 일어설 나이라고 했는데 저는 지금 딛고 일어설 땅도 없고 일어선대야 지향할데도 없습니다. 나라를 찾자고 독립군을 따라다닌 8년간이 이제 와서 보면 하나의 방황이였습니다. 독립군의 지도자들은파쟁으로 싸움의 방향을 잃었고 휘하독립군은 구심점없이 헤매고있습니다. 지금 만주땅에서 3부가 군웅할거하듯 대립하여 군자금을 걷어들이는데도 지경이 생겼고 각파간에 서로 승벽내기입니다. 독립군을 먹여살리고 무장을 갖추자면 방대한 군자금이 드는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든것이 만주에 이주해온 우리 농민의 빈약한 호주머니에 전적으로 의존하고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렴주구도 례사로이 하니 어느덧 독립군이 백성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되여가고있습니다. 근본적인 목적에서 떠난 이런 독립군에 대하여 저는 회의의 눈으로 보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지금 독립군에는 절박한 군자금문제와 군사적통일문제를 해결할만 한지도자가 없습니다. 내노라 하는분들이지만 너무도 고루하고 게다가 파쟁에 눈이 어두워져 독립군을 자기의 목적에로 이끌어가지 못하고있습니다. 무능하고 부패한 낡은 세대의 희생물이 되여 이렇게 목적지향성없이 방황할바에야 차라리 군복을 벗어버리고 고국으로 돌아가 보다 보람있는 일을 했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마음을 의지할데가 없어지니 고향그리운 생각이 부쩍 더 납니다.》

리윤재는 무겁게 입을 다물고있었다. 이 적라라한 토로에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최기봉이 8년동안 자신의 젊음도 피도 아끼지 않고 쌓아올린 공든 탑을 하루아침에 허물어버리라고 할수 없다. 그렇다고 이미 석양길에 들어선 독립군과 운명을 같이하라고 할수도 없다. 그의 번민은 단순한 향수에서 오는것이 아니라 낡고 부패한것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된것이다. 그래서 새로운것에 대한 지향으로 모대기는것이다. 그러나 리윤재는 그에게 새 지향을 똑똑히 말해줄수가 없다.

한참 침묵이 흐른 후 리윤재가 비로소 말했다.

《나는 최군에게 귀국하라고 권고할수가 없소. 국내의 형편은 말이 아니요. 사이또의 <문화통치>란 곧 민족동화정책이니 민족정신의 말살이 그네들의 기본목표요. 왜놈들의 이 장단에 일부 지식인이 춤을 추고있소. 그야말로 부패타락의 막바지요. 민족정신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은 왜적의 정신적, 육체적고문을 이겨내야 하오. 조선학자들이 제 나라의 말과 글을 연구하는것도 범죄시되여 살얼음우를 걷듯 하오. 이런 정황에서 민족의 얼을 지키며 남도 그렇게 가르치는것은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길이요. 우리야 어차피 그 길로 나아가기마련이지만 일단 무장을 들었던 최군이 무엇때문에 그런 십자가를 지겠소.》

《그래서 저도 단호한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있습니다.》

《해외에서 국내로 들어가는것도 왜경의 감시가 심해서 어려울거요. 그렇지만 만일 결심하고 귀국하겠다면 내 한가지 방도는 대줄수 있소. 서울근교에 화계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곳 주지가 나의 죽마고우요. 김해보통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일이 있고 그후 그는 배재학당에까지 다녔는데 끝내 중이 되고말았소. 알고보니 그의 아버지도 중이였다더군. 지금은 그 절의 주지를 하고있는데 이름은 정관모이고 법명은 청악이요. 깨끗한 민족주의자이고 지식인이니 잘 이야기하면 리해하고 절에 받아줄거요. 이렇게 경력을 한번 구불리면 왜경의 감시의 눈을 피할수 있고 그후 필요할 때 환속하면 그만이요.》

《선생님, 마음에 새겨두겠습니다.》

《그러나 될수 있으면 여기서 설자리를 마련해보오. 국내에서의 우리 어문운동도 어렵기 그지없소. 이렇다할만 한 일도 못하면서 고생만 하지. 다 왜놈의 탄압때문이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조선어사전편찬때문에 상해에 오셨다던데 그 일은 성사가 됐습니까?》

《아니요. 우리가 사전의 어휘수집부터 새로 시작하자니 너무 품과 시간이 많이 걸려 김두봉이 상해에 올 때 가지고 온 <말모이>원고를 찾아가려고 왔던거요. <말모이>란 1910년경에 주시경씨와 몇분이 착수했다가 끝내지 못한 사전원고요. 그런데 김두봉은 그 원고를 자기가 완성하겠으니 내놓지 못하겠다는거요. 그대신 그 일에 전심할수 있도록 생활비로 이백원만 보내달라더군.》

이 말에 최기봉이 도리여 분개했다.

《그 원고 하나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머나먼 길을 오셨는데 제것도 아닌 원고를 움켜쥐고 내놓지 않는 그가 무슨 량심있는 학자입니까. 호구책도 없이 과객노릇이나 하며 림정에서 한자리 얻어볼가 해서 끼웃거리는 그 량반이 어느 하가에 사전을 손질한단 말입니까. 입으로는 애국애족을 부르짖으면서 실지 행동에서는 딴판인게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찌 다 한결같겠소.》하고 대범하게 말하는 리윤재의 어조에도 실망과 노여움이 어려있었다.

《왜놈이 조선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하든 우리말을 정리하여 사전에 모아라도 둬야 하겠소. 그런데 우리에겐 사전을 만들 돈도 없고 시간도 모자라오. 그래도 우리는 만난을 무릅쓰고 이 일만은 해놔야 하오.》

최기봉은 제 나라 말을 지키려는 리윤재의 뜨거운 마음과 자기희생정신이 가슴에 찡하고 울려왔다.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는 리윤재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흔히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된다. 학문도 자신의명예와 리익에 복종시키는 야심많은 김두봉과 같은 사람은 흔히 똑똑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인간의 진가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고 최기봉은 생각했다.

밤이 깊었다. 둘이 자리를 나란히 하고 누웠으나 이윽토록 잠을 이룰수 없었다. 이 우연한 상봉으로 다시 인연을 맺은 그들은 옛정을 되살리고 서로의 전도를 생각하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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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장편실화소설 《민족의 얼》을 보내드렸습니다.

오늘은 스물다섯번째시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