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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7(2018)년 6월 11일 《통일의 메아리》
조상의 땅을 지켜 ( 84 )

장편사화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리성환 작《조상의 땅을 지켜》,오늘은 여든네번째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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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거란의 2차침공을 물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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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는 거란군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순국렬사들에게 벼슬과 상을 내렸다.

양규에게는 공부상서의 벼슬이 추증되고 그의 아들 양대춘에게는 교서랑의 관직이 내려졌다. 양규의 처 홍씨에게는 년봉으로 해마다 곡식을 주도록 령이 내려졌다.

김숙홍에게는 장수(장군)의 칭호를 내리고 그의 어머니에게도 종신토록 매년 50석의 곡식을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양규와 김숙홍에게 삼한후벽상 공신칭호가 내려지고 공신각에 초상이 나붙어 후대들에게 전해지게 하였다.

벼슬과 상은 살아있는 공신들에게도 내려졌다.

유방은 개경방어전과 평양성이북으로 거란군을 구축하는 싸움을 잘 지휘한것으로 하여 병부상서 겸 상장군으로 임명되였다.

강은천에게는 한림원의 학사승지벼슬이 내려졌다.

정3품의 학사승지는 한림원(임금의 어지로 내려지는 일체 문건과 법령, 명령서, 지시서, 외교문건을 만들어내는 관청)의 두번째 자리였다. 우두머리는 시중이나 상서령이 겸하게 되여있어 실제상으로는 두번째자리인 학사승지가 한림원을 주관하였다. 임금의 머리역할을 하는 부서의 책임자가 된것이였다.

임금은 학사승지로 임명하는 자리에서 은천의 이름을 감찬이라고 지어주었다.

땅을 의미하는 감자에 돕는다는 뜻의 찬자였다. 땅을 지키는 일을 잘 도왔다는 의미와 함께 나라일을 살피는 임금의 일을 잘 도우라는 의미깊은 당부가 깃든 이름이였다.

이번 싸움(거란의 2차침입을 물리친 싸움)의 전과정을 살펴보매 많은 대신관료들과 장수들이 부닥친 국난을 타개하는 싸움에 무수한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강감찬처럼 사심없이 대바르게 임금 자기를 보필한 사람이 과연 있었던가.

다른것은 말고라도 임금이 나서서 거란왕에게 머리를 숙이여 위기를 면하자 하나같이 입을 모아갈 때 유독 강감찬만이 반대해나섰다.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고 주장하고 실지 행동으로 보여준 감찬이였다. 나라의 위상과 함께 임금의 체면을 지켜준것이였다.

하지만 감찬은 임금의 이 치하앞에 면구스러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백성들과 군사들이 하나같이 떨쳐나 나라를 지켜싸웠기에 오늘의 승리가 있었다고 확신하는 감찬이였다.

감찬은 하공진을 구원하지 못한것이 자기 불찰이라고 고민하고있었다.

하공진은 돌아오지 못하였다. 거란왕이 끝내 억류해간것이였다.

감찬은 하공진을 두고 자책을 금치 못하였다.

그렇다고 거기에만 옴해있을수가 없었다.

전란의 후과를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국사처리로 매일같이 내려지는 임금의 어지가 감찬의 손을 거쳐야 했기때문이였다.

감찬은 다망한 속에서도 전란과정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찾아내여 포상하는 일과 그릇되게 행동한자들을 처벌하는 일에 적지 않게 관심을 돌렸다.

형부에서 올려온 제의에 따라 랑중 백행린의 관직을 박탈하도록 한것이 그 례였다.

백행린은 개경방어때 자기 패거리와 노비들로 따로 부대를 꾸려가지고 천마산 한쪽귀퉁이에 들어가있으면서 고려군의 력량이 딸려 전전긍긍하던 그 시기에 마지막까지 출전하지 않았었다. 유방도 이 일을 두고 격분하여 백행린을 처벌하려고 벼르다가 서경으로 출전하는 바람에 흘려버렸다.

감찬은 승리한 후에라도 이런 기피자들은 용서할수 없다 생각되여 형부의 제의를 따랐다.

이에 대해 임금은 목은 베지 말고 파직시켜 평민으로 떨구라고 지시했다.

감찬은 탁사정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하는 지채문의 권고도 심중하게 대하였다.

지채문은 임금의 어명으로 동계 화주(화성)에서 부대를 기동시켜 서경으로 이동해올 때 탁사정이 어물거리면서 인차 자기 꼬리를 따라물지 않았던것을 매우 못마땅해하고있었다. 그후에 서경방어전에서 적을 구축하는 싸움을 함께 벌릴 때에도 지채문 자기를 선봉에 나가게 하여 적의 포위에 들게 하고는 탁사정자신은 성안으로 들어가버렸으며 이후에 대도수를 꾀여 성밖으로 나가 싸우자 하고는 그와 협공을 하지 않고 자취를 감추었던것을 묵과해둘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런 사람이 임금의 총애를 받아 어사중승이 되고 우간의대부가 되여있는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것이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였다.

감찬이 알아본바에 의하면 탁사정은 서경방어때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행동하였지만 거란군의 포위에 겁을 먹고 대도수를 꾀여 협공을 운운하면서 서문으로 빠져나간 뒤 남쪽으로 퇴군하여오다가 도중에 산속에 들어가 은거해있었다. 병을 만나 몸을 가눌수 없었다는게 그 리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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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장편사화 《조상의 땅을 지켜》를 보내드렸습니다.

오늘은 여든네번째시간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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