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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8(2019)년 2월 9일 《통일의 메아리》
《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은 군국주의적령토야망의 발현》(5)

이 시간에는 전시간에 이어 본 방송기자와 남조선문제전문가 고명훈선생과 나눈 문답 《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은 군국주의적령토야망의 발현》을 계속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다섯번째시간입니다.

 

방송기자(1); 안녕하십니까.

남조선문제전문가(2); 안녕하십니까.

1; 날강도 일제의 령토침략책동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2; 예. 그렇게 합시다. 울릉도, 독도에 대한 일본의 뿌리깊은 침략책동은 명치유신이후 《정한론》이 국책화되면서 조선강점정책의 일환으로 더욱 악랄하게 감행되였습니다. 명치정부는 1869년 12월 외무성관리들인 사다, 모리야마, 사이또 등을 부산에 파견하면서 그 내탐사항중의 하나로서 울릉도와 독도(죽도와 송도)가 조선에 속하게 된 경위를 알아올데 대한 지령을 주었습니다. 1882년 임오군인폭동이후 일본정부는 조선주재 일본공사에게 보낸 폭동의 피해보상을 받을데 대한 《훈령》에서 울릉도의 양도를 받아낼데 대한 지시를 주었습니다.

이러한 침략시도는 1904~1905년 로일전쟁을 계기로 적극적인 단계에로 들어서게 되였습니다.

1; 예. 그러니 울릉도, 독도가 당시 로일전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것이 아니겠습니까.

2; 그렇습니다. 로일전쟁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침략전쟁이였으며 당시 조선동해지역은 그 중요한 작전수역이였습니다. 남하하는 짜리로씨야함대를 감시함에 있어서 바다한가운데에 위치한 독도는 그야말로 최적지였으며 이로부터 일본은 조선과 울릉도, 독도, 일본본토를 련결하는 감시체계를 계획하고 추진시키고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제출된 나까이의 독도임대청원은 오래도록 이루지 못한 독도강탈의 꿈을 실현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이렇게 되여 나까이의 초기목적이였던 임대청원은 《령토편입 및 임대청원》으로 확대되게 되였고 이에 기초하여 독도의 《시마네현편입》이 이루어지게 되였던것입니다.

1; 예. 이상의 력사적사실은 독도의 《시마네현편입》이 완전한 모략의 산물이라는것을 뚜렷이 보여주는 자료들이 아니겠습니까.

2; 그렇습니다. 하기에 강도 일제는 독도의 《시마네현편입》을 국제법적요구에 맞게 중앙신문을 통하여 널리 고시하지도 못하였고 조선봉건정부에 공식적으로 통고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일본은 독도의 《시마네현편입》으로부터 1년이 훨씬 지난 1906년 3월 28일에야 다시말하여 1905년 7~8월 《가쯔라-타프트협정》과 제2차 영일동맹으로 미국과 영국의 입을 틀어막고 1905년 9월 《포츠머스강화조약》으로 로씨야를 이겨 어느 렬강도 저들의 독도강탈에 대해 항변을 제기할수 없고 특히는 섬의 령유국인 조선이 《을사5조약》의 날조와 식민지통치로 국권을 완전히 잃은 시기를 택하여 그것도 지방관리를 울릉군수에게 보내여 《독도가 일본령지가 되였으므로 사찰차로 섬에 왔다.》고 말을 흘리는 식으로 알리여왔습니다.

1; 독도의 《시마네현편입》의 비법성은 또 어디에서 찾아볼수 있습니까.

2; 그것은 다음으로 독도의 《시마네현편입》이 조선인민은 물론 국제사회계의 그 어떤 인정도 받지 못한데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일본의 독도《편입》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있다가 1906년 3월이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봉건왕조의 관리들과 각계 인사들속에서는 일본의 날강도행위에 치솟는 격분을 금치 못해하며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도 독도강탈행위에 각종 형태로 항의해나섰습니다.

1; 그럼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십시오.

2;《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주요신문들은 일제히 일본의 독도강탈소식을 활자크기를 배로 하고 《큰 변이 나다》는 제목으로 항의보도하였고 전라도의 애국지사 황현을 비롯한 지식인들도 일본이 독도를 자기 령지라고 하는것은 완전한 억지라고 규탄하였습니다.

일본이 독도를 《편입》한지 3년후에 출판된 《중보문헌비고》에서도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우산국의 속지라고 명기함으로써 독도가 우산국아래 우리 나라의 령역이라는것을 명백히 천명하였습니다.

1; 예. 그것은 독도의 《시마네현편입》이 조선봉건정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강제로 실행되였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 아니겠습니까.

2; 그렇습니다. 우리 인민의 항의규탄과 여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봉건정부가 일본정부에 공식 항의하지 못한것은 전적으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송두리채 빼앗겼기때문이였습니다.

그러므로 독도는 1905년 2월 일본에 의하여 《령토편입》된것이 아니라 1910년 전조선과 함께 병탄된것이며 따라서 1945년 8월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본래 주인에게 당연히 돌아온것입니다.

일본의 《시마네현편입》이 비법적인것이기때문에 패망후 일본의 령토처리를 위한 국제협약들에서도 독도는 일본령토가 아니라 조선령토로 규정되고 처리되였습니다. 이것은 1905년 일본의 독도《편입》이 비법이며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 략취된것》이라는 국제적공인에 기초한것이였습니다.

이처럼 독도의 《시마네현편입》은 완전한 불법무효의 사기행위로서 일제의 조선강점정책과 령토야망의 범죄적산물이였습니다.

1; 그럼 오늘은 여기서 이만하고 다음시간에 계속 했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2; 예. 그렇게 합시다.

 

 

지금까지 전시간에 이어 본 방송기자와 남조선문제전문가 고명훈선생과 나눈 문답 《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은 군국주의적령토야망의 발현》을 계속해서 보내드렸습니다.

오늘은 다섯번째시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