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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 107(2018)년 4월 14일 《통일의 메아리》
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은 령토야망의 발현이다 (3)

최근 일본반동들은 《독도령유권》교육을 의무화하도록 하는 학습지도요령개정안이라는것을 공시하는 등 독도강탈야망을 날로 더욱 로골적으로 드러내놓고있습니다.

그럼 이 시간에는 전시간에 이어 일본의 강도적인 《독도령유권》주장에 대해 사회과학원 김진철연구사와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한은혁교원이 나눈 대담 《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은 령토야망의 발현이다》를 계속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세번째시간입니다.

 

사회과학원 김진철연구사(1); 안녕하십니까.

력사학부 한은혁교원(2); 안녕하십니까.

1; 전시간에 이어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2; 예. 다음으로 이야기할것은 독도는 일본의 력대 정부들에 의하여 조선령유권이 공식확인된 조선의 신성한 령토였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도꾸가와막부가 울릉도, 독도는 조선의 령유권이라고 인정했습니다. 도꾸가와막부가 울릉도, 독도의 조선령유권을 공식인정한 중요한 자료로서는 1693년 안룡복의 1차 울릉도행때 백기주태수가 막부의 승인밑에 안룡복에게 만들어준 《관백의 서계》와 1696년 1월 막부의 결정입니다.

1; 예. 당시 조선봉건정부가 울릉도에 대하여 《공도정책》을 실시하게 되자 이를 더없이 좋은 기회로 여긴 호끼지방 요나꼬의 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이 막부로부터 《죽도도해면허》(1618년)와 《송도도해면허》(1661년)를 발급받아가지고 30~70여년간에 걸쳐 비법적인 물고기잡이를 하였으며 그것은 마침내 조선어민들과의 충돌을 야기시키게 되였습니다.

2; 그렇습니다. 동래어민 안룡복은 1693년 봄 1차 울릉도행때 오끼도주와 백기주태수에게 《울릉도는 우리 나라에서 하루길이고 일본에서는 닷새길이니 어찌 우리 나라에 속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일본인들의 부당한 침범행위에 대하여 규탄하고 제나라 땅에 왔는데 왜 구속하는가고 들이댔습니다. 말문이 막힌 백기주태수는 하는수없이 막부에 보고하고 《울릉도는 일본의 지경이 아니다.》는 《관백의 서계》를 만들어주었습니다.

1; 예. 그렇습니다. 이 《관백의 서계》는 비록 일본의 지방관리가 조선의 한 어민에게 만들어준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울릉도에 대한 조선의 령유권을 공식 인정한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백기주태수가 제 마음대로 써준것이 아니라 막부에 보고하고 그의 승인밑에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만들어준 문서이기때문입니다. 이때 막부가 승인한 《관백의 서계》에는 울릉도뿐아니라 독도도 포함되여있었습니다.

그것은 1696년 2차 울릉도행때 오끼도주와 백기주태수에게 각각 《전날 내가 여기에 들어와서 울릉도와 자산도(우산도) 등을 조선의 지경으로 확인하였고 지어 관백의 문서까지 있다》, 《전날 두 섬의 문제로 문서를 받아가지고 간것이 명백하다》고 하고있는것, 송도(독도)에 기여든 일본인들에게 《송도는 곧 우산도이고 이 역시 우리 나라 땅이다》라고 한것, 《울릉자산량도감세장》을 칭한것, 백기주태수가 안룡복에게 《량도(울릉도와 독도)가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다시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처벌할것을 약속한 사실 등에 의하여 여실히 증명됩니다.

2; 예, 1696년 1월 28일 도꾸가와막부가 《죽도와 그밖의 한 섬 (독도) 》에 대한 조선의 령유권을 공식 인정하고 두 섬에 대한 일본인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한것은 일본정부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조선의 령유권을 확인한 자료들중의 하나입니다.

1693년 11월 안룡복이 송환된 이후 조선봉건정부와 도꾸가와막부사이에는 울릉도문제를 둘러싸고 외교적론쟁이 치렬하게 벌어졌습니다.

특히 1694년에 남구만, 윤지완 등 강경론자들이 집권하게 되자 조선봉건정부는 울릉도문제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처해나섰습니다. 이렇게 되자 울릉도와 죽도가 1도 2명(한 섬에 두 이름)인것을 리용하여 섬을 가로채보려던 쯔시마도주의 교활한 계책은 실패에 직면하게 되였습니다.

1; 예. 한편 울릉도가 저들의 령도라고 극구 주장하던 쯔시마도주 소요시 쯔구가 죽고 그의 어린 아우 소요시 미찌가 새 도주로 되자 후견인인 소요시 자네는 1696년 1월 상경하여 막부의 장군들과 울릉도문제를 론의하게 되였고 결과 막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정을 내리게 되였습니다.

《그 땅의 지리를 헤아려보건대》 죽도는 조선이 일본보다 더 가까우니 《일찌기 그 나라 땅이라는것이 의심할바 없을것 같다》, 《요나꼬의 어민들이 고기잡이를 가겠다고 청원하기에 허락된것》이지 《당초에 이 섬을 빼앗은것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고기잡이하는것을 금지해야 할뿐이다》, 이에 대하여 조선정부에 알려줄것이다

2; 예. 거기서 《죽도》는 구체적으로는 《죽도와 그밖의 한 섬》이였으며 죽도외 한 섬은 다름아닌 송도 즉 독도였습니다. 그것은 일본 《공문록》에서 《죽도(울릉도) ...다음에 한 섬이 있는데 송도(독도)라고 부른다.》고 한데서 명백히 알수 있습니다. 이로써 막부정부는 울릉도, 독도 두 섬에 대한 조선의 령유권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인정하였으며 이로부터 종전의 비법적인 죽도, 송도의 도해면허는 자동적으로 취소되였습니다.

1; 예. 1696년 1월의 막부결정은 그것이 일본정부가 조선정부에 대하여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령유권을 공식 인정한것이라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이만하고 다음시간에 계속하는것이 어떻습니까?       

2; 예. 그렇게 합시다.

 

지금까지 사회과학원 김진철연구사와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한은혁선생이 나눈 대담 《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은 군국주의적령토야망의 발현이다》를 보내드렸습니다.

오늘은 세번째시간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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