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8(2019)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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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8(2019)년 9월 17일 《통일의 메아리》
민족의 얼(36)

장편실화소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리원주, 리원갑 작 《민족의 얼》, 오늘은 서른여섯번째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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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는 기가 막힌듯 방금 한 말을 되풀이했다.

《그런데 왔다는 사람이 어딜 갔소?》

《아무리 붙들어도 려관에서 묵고 래일 아침에 오겠다고 뿌득뿌득 나갔어요. 집이 이렇게 비좁으니까요.》

《원, 사람도.》하고 리윤재는 한마디 할뿐이였다. 그리고 다시 펜을 쥔다.

《아이참, 저이하곤 말할 재미가 있어야지. 이봐요, 동생이 인선이를 서울에서 고등보통학교에 넣어 공부시키려고 데리고 왔는데 고모라는게 서울에서 살고있으면서 조카를 어떻게 하숙에 보내겠어요. 아무래도 우리가 그애를 맡아야 할것 같은데…》

《당신 좋도록 하구려.》하고 리윤재가 한마디로 안해의 말을 중둥무이해버렸다. 그는 학문이외의 모든것에 거의 무관심했다.

《부자집에서 호의호식하던 외아들을 거두기가 수월치 않을것 같아서 그래요. 아이가 약질이던데.》

리윤재는 더는 대답하지 않고 원고에 달라붙었다. 안해는 낮에 다듬이질한 남편의 옷을 차곡차곡 개여서 보에 싸가지고 지근지근 밟기 시작했다.

리윤재는 원고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했지만 이 많은 식솔을 먹여살리기에 눈코뜰새 없는 안해가 또 하나의 까다로운 식구를 붙여놓으면 그 심신의 고달픔이 얼마나 더 클것인가 하는것을 속으로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정성택이 아들 인선을 데리고 찾아왔다. 정성택은 이제 마흔살에 들어선 한창나이의 장년이고 단단한 몸에서도, 목소리에서도 쇠소리가 날듯 한 점은 전과 다름이 없는데 전에 비하여 몸이 좀 난것이 알리였다. 이 야무진 아버지와 허우대 크고 성격이 드센 어머니와는 달리 인선은 목이 길고 여위고 키만 꺽두룩한 소년이였다. 하얀 얼굴이 균형있게 생겼는데 퍽 과묵하고 어딘지 내성적이였다. 그는 두 벽을 꽉 채운 서가의 장서에서 눈을 뗄줄 몰랐다. 그속에는 소년들을 위한 책은 하나도 없었지만 조선의 력사, 문화, 언어 등에 관한 다양한 책들이 서가에 꽉 차있었고 서가가 모자라 《동광》, 《진생》 등 잡지들과 옛 신문들은 한쪽벽에 무둑히 쌓여있었다. 그 책들을 황홀하게 바라보는 인선의 눈은 류달리 반짝이였다.

《저애는 나가놀줄 아나 동무들 하고 섞일줄 아나. 그저 책밖에 모르지 않아요. 원, 가문에 없는 중놈이라더니.》하고 정성택이 자랑반, 꾸지람반으로 말하고 아들에게 아래방에 가서 누이들과 놀라고 일렀다. 인선은 순경이와 동갑이지만 생일이 몇달아래였다. 인선이 방에서 나가자 정성택이 말을 이었다.

《소는 길러 산으로 보내고 사람은 길러 도회지로 보내랬다고 아무래도 인선이를 서울에서 공부시켜야 할것 같아 데리고 왔어요.》

《그래, 어느 학교에 넣으려나?》

《제1고보나 제2고보 같은 공립학교에 어떨가 하는데 공부는 잘하니까.》

《왜 하필이면 왜놈의 공립학교야. 제1고보에서는 왜놈의 아이와 조선아이가 함께 공부한다는걸 모르나?》

《그러니까 교육시설이 좋고 상급학교입학률이 높지 않아요.》

《그런 학교에서 왜놈의 종자와 조선아이를 똑같이 대할것 같은가. 이 세상에서 사람을 차별하는것처럼 못된짓은 없는데 왜놈의 민족차별이란 이루 헤아릴수 없는거야. 광주학생사건이 그걸 얼마나 똑똑히 보여주었나. 인선이를 어릴적부터 얼간을 만들지 말고 제정신을 가진 인간으로 키우게. 그건 조선사람으로 키우는거야.》

정성택은 잠자코 듣고있었다. 오늘은 될수록 자형(손우 누이의 남편으로서 매부를 말함)과 마찰을 피하려는 심산같았다.

리윤재가 말을 이었다.

《내가 보니 인선이가 좀 약질이지만 재주는 있어보이는군. 우리 집에 맡겨놓게.》

《그러지 않아도 내 생각이 많아요. 마음이 약한 저애를 여느 하숙집에 넣었다가 불량한 아이들의 꼬임에 넘어가도 야단이고, 자형댁에 맡기면 그럴 근심은 없는데 누님에게 너무 부담을 줄것 같고 해서 말이요. 아무리 구차하게 살아도 고모가 낫겠지. 저애에게 드는 비용은 내가 당하리다.》

《뭐, 비용을 당하겠다고? 이 사람아, 동기간에 무슨 돈흥정이야. 순경 에미가 인선이의 근심을 하기에 내가 말했을뿐이야. 자네 이제는 부자소리를 듣게 됐는데 그 돈은 뒀다가 뭘 하겠나. 우리 조선어학회에 기부나 좀 하게. 돈이 없어 사전편찬을 중단했어.》

정성택이 손을 홰홰 저었다.

《자형, 이런 말을 한다고 나를 욕하지는 마시오. 자형이 하는 조선어학회의 일이 왜놈의 비위에는 안 맞는 일이겠지요. 그놈들은 조선말을 깡그리 없애버리려고 하는데 자형과 같은이들은 그것을 지키겠다고 하니 그놈들이 바로 볼턱이 있어요. 세상에 왜놈처럼 악독한 식민지통치자가 어디 있어요. 그놈들이 언제까지나 조선어학회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거예요. 두고보시오, 내 말이 틀리나.》

《그러니 돈을 냈다가 련루자가 될가봐 겁이 난단 말이지.》

《까놓고 말해서 오늘과 같은 세상에서 조선어를 연구하고 지켜서 돈이 생기오, 명예가 얻어지오. 생길건 고생뿐이지요. 그런 점에서 자형은 세상 모르는 바보예요. 자형, 이 많은 가족들도 생각해야지요.》

끝내 정성택의 처세철학이 나오고말았다. 참고 듣고있던 리윤재도 불끈했다.

《그러니 나도 자네처럼 살라는건가. 자넨 자신뿐아니라 자식도 생각해야 하네. 자식이 커가면 부모에 대해 비평적으로 보게 되네. 부모가 자라나는 자식의 마음에 그늘을 던져줘서야 쓰나. 부모를 존경하지 못하는 자식, 자식을 믿지 않는 부모, 이 얼마나 큰 불행인가!》

이야기는 더이상 벌어지지 않았지만 매부처남간의 사이에는 그전보다 더 멀어졌다.

이 좁은 집에 고루고루한 아이들이 이제는 여섯이 살게 되였다.

리윤재는 바쁜 나머지 아이들의 교육과 교양에는 거의 등한했지만 그들의 각이한 개성이 눈에 띄지 않을수 없었다. 우의 딸 둘은 속을 태우며 손수 기른 일이 없고 오래 헤여져살아 그런지 아버지를 어려워하여 자연 거리 비슷한것이 생겼지만 막내딸과 두 아들은 강보때부터 정이 들어 그런지 그런 거리가 없었다. 성미가 순하여 두살아래인 동생한테도 늘 져서 잘 운다고 울보라는 별명까지 붙은 종갑보다 장난과 떼가 심하고 제가 하고싶은짓은 무엇이건 주저함이 없는게 종주였다. 외탁을 하여 남달리 곱게 생긴 종주를 늘 데리고 가는 이웃집 과부가 하루는 아이의 뺨을 깨물어 이발자국을 내가지고 데려와서 할머니의 노여움을 샀지만 리윤재는 도리여 남의 사랑을 받을수 있는 성미와 생김새를 가졌다는것을 만족하게 생각했다.

어린 종갑, 종주와는 말할것도 없고 제또래인 누이들과도 어울리지 않는것이 인선이였다. 음식에는 조금도 욕심이 없는 그가 독서에는 탐욕스러울 정도였다. 고모부의 책들과 오랜 잡지들을 제 방에 날라다 놓고 두더지처럼 방안에 처박혀있는것이였다. 그는 새 학년도에 고모부의 권고로 전통이 가장 오랜 배재고보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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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장편실화소설 《민족의 얼》을 보내드렸습니다.

오늘은 서른여섯번째시간이였습니다.